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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학의 "마감 시간이 있어 좋은 이유"

청룡검객 2016. 3. 16. 08:27


마감 시간이 있어 좋은 이유

김지학


  
▲ 필자 김지학(보건교사)

[서울=세종인뉴스] 김지학 칼럼니스트= 조지 오웰의 명작 <1984>에서는 마침내 빅브라더에 대항하는 대신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함으로써 전체주의에 굴복하도록 유인하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지막지만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일기쓰기’다. 소소한 일상을 펜으로 직접 써내려가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세상은 어떻게 변하는지 끊임없이 사색하면서 개인의 존엄성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전체주의에 침식당하지 않는 무기라니, 대작가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운 좋게도 최근 몇 년 동안 강제로 글을 써야 하는 일이 생겼다. 처음 시작은 우리 지역의 모 신문에 <보건실 이야기>라는 코너가 생긴 게 계기가 되었다. 앞서 매주 1회씩 칼럼을 게재하시던 선생님께서 다른 지역으로 전근가시면서, 어렵게 만들어진 지면이 폐쇄되는 것은 막아야하니 어떻게든 써보라는 강권 때문에 시작하게 되었다.

학교보건의 이슈, 보건실의 일상, 보건교사로서의 고민 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준비는 안 되었지만 덜컥 이어 맡았다.

처음에는 교직에서 수년 간 경험한 내용만 써도 금 새 한편이 완성되었다. 주로 전교 꼴찌부터 말썽꾸러기 아이들이 보건실을 자주 찾는데, 아이들의 비범한 일상은 그야말로 눈길을 끄는 소재가 되었고, 그 아이들과의 일상생활만 써도 소설 몇 권 분량은 넘치고도 남았다.


게다가 학교 보건 현장은 늘 불합리한 이슈들이 때마다 쏟아져 나왔기에 다른 이들이 고민하는 소재 고갈은 쉬이 오지 않았다. 교사들에게 정수기 수질 검사, 물탱크 청소, 실내 공기질 관리 등 시설관리를 맡기는 환경위생관리 정책, 학부모 동의 없이 필요시 학생들의 정신건강검사를 실시할 수 있는 학교보건법령, 수년 째 65% 내외에서 제자리걸음인 전국 보건교사 배치율, 거대학급의 보건 보조 인력에 대한 지방교육자치의 갖가지 대응과 철학, 국가수준의 법정 보건교육과정 해태, 상담, 급식, 안전공제 등 중요한 정책 과제를 대응할 인력이 부족할 때면 어김없이 보건교사를 업무 땜질에 활용하는 세태, 학교운영위원회 심의 사항으로 학교보건 의제가 배제되어 있는 현 법령의 문제점 등 파고 또 파도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문제들은 끝없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독서도 글의 소재로 삼았다. 원래는 독서를 하면 바로 책을 덮는 게 습관이었는데 강제 글쓰기에 돌입하면서 독서 패턴이 바뀌었다. 성실하게 이어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블로그를 만들어 간단하게라도 독후감을 적는 습관이 생겼다. 혹시 모를 소재 고갈의 두려움은 고질병인 게으름마저 이기는 촉매제가 되었다.

학교보건의 문제를 특정 직업인의 이기심으로 치부하지 않도록 하려면 보편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게 중요하다보니, 관심 분야도 억지라도 사회학, 인문학 등으로 넓힐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마감 시간이 있는 강제 글쓰기는 생활양식을 많이 바꾸었다. 아이들의 이야기나 행동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싫든 좋든 학교보건의 제 문제에 대해 촉각을 세우게 되었으며, 억지춘향이더라도 책을 붙들 게 되었다.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나태한 내가 마감 시간이 없었더라면, 과연 바뀔 수 있었을까 싶다.

죽음을 다룬 어느 프로그램을 보니, 영국에서는 아이들에게 죽음에 대해 가르치고, 유언장을 쓰게 하는 게 새로운 교육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죽음이라는 마감 시간이 있으므로, 한정된 시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할는지 고민하다보면 현재의 좌표에서 더 풍성하고 올곧게 살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반영되었다고.


출근하자마자 오늘 해야 할 일을 적고 보니, 마감 시간에 쫓기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불평을 쏟으려다 마감 시간이 내게 있어 좋은 이유를 차근차근 생각해보며, 밀도 있게 살아내도록 종용하는 마감 시간이 있음에 더욱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편집자 주 : 필자 김지학은 중흥고등학교 현직 보건교사로 학교 현장의 생생한 경험과, 보건교육에 대한 불합리리한 교과 과정 등에 대한 일상들을 잔잔하지만 예리한 필력으로 세종인뉴스에 칼럼을 기고한다]